이전에 즐겨 부르던 찬송가 중에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왜 저 ‘높은 곳을 향해 가야 ’할까요? 오늘날 젊은 세대들에게는 금방 잘 와 닿지 않는 가사이지요.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수준에서, 우리 눈높이에 같이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낮고 비천한 우리를 위해 땅 아래까지 자신을 낮추고 내려오십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이 그러하고, 십자가가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본질이 원래 우리 수준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분은 높고 높은 곳에 계신, 우리와 ‘급’이 완전 다른 분이십니다. 예배는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저 위’를 지향해야 합니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성전이 높은 산 위에 있고, 성전 바깥뜰로 가는 층계가 7계단이며, 안뜰로 오르는 층계는 8계단이며, 내전까지는 또 12계단이나 더 올라가야 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들은 예배 때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찬을 받을 때 ‘우리 마음을 주께 올려드립니다!(라틴어 Sursum Corda)’ 라는
부활절은 전 세계가 함께 축하하며 가정과 교회, 거리와 광장에서 기쁨을 나누는 절기입니다. 미국에서는 부활절 시즌이 다가오면 두 가지가 확연히 눈에 띠게 달라집니다. 첫번째, 마트 진열대의 색상이 알록달록한 파스텔 색상 위주로 바뀌고 부활절 계란을 장식할 수 있는 소품들과 파티 용품들이 엄청 쏟아져 나옵니다. 두 번째, 사람들의 옷차림이 확 바뀝니다. 그전까지 주로 칙칙하거나 어두운 색을 입던 사람들이 갑자기 밝은 핑크, 노랑, 흰색, 연두 등의 산뜻한 칼라의 옷들을 입습니다. 그래서 확연하게 계절이 바뀌고 봄이 왔다는 것, 부활절 시즌이 되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부활절에만 먹는 특별한 음식들도 있습니다. 주로 계란 요리가 많고, 십자가 모양으로 장식한 부활절 빵(Cross Burn)도 먹고, 이 시즌에 가장 맛있게 숙성하는 신선한 햄을 사서 부활절 만찬을 장식하기도 합니다. 거리에는 튤립과 벚꽃 등 아름다운 봄꽃들이 부활 시즌을 알려줍니다. 교회마다 화려한 오르간과 밴드에 맞추어 힘찬 부활 찬송이 울려퍼지고, 사람들은 환하게 웃으며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Christ is risen)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Christ is ris
고대 악기 중에 가장 큰 소리를 내는 악기가 나팔입니다. 성경에는 나팔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예는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나팔입니다. 하지만 복음서와 서신서에도 나팔이 자주 언급됩니다. “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24:31). “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고전15:51). 왜 하필 나팔이 이렇게 자주 등장할까요? 그 나팔이 오늘 우리와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그 답을 오늘 민수가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두 개의 은나팔을 만들어서 제사장에게 불라고 하신 것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약속의 땅을 향한 행군을 지휘하는 현실적 목적입니다. 나팔을 크고 짧게 끊어서 불면 캠프를 걷고 행군을 시작하고, 나팔을 작게 불면 행군을 멈추고 캠프를 칩니다. 다시 말해, 이 나팔은 매일의 걸음을 인도하는 나팔입니다. 두 번째 목적은 백성들을 예배의 자리에 성회로 모을 때입니다. 이 때는 나팔을 크고 길게 붑니다. 이것은 광야에서뿐만 아니라,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년 전 청년들과 성경공부를 할 때입니다. 성경공부 오프닝 시간에 청년들의 생각도 알고, 서로 마음도 열고 할 목적으로, 사소한 질문을 한 가지씩 던지는데, 그날 질문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과연 있는가’ 였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청년들이 의외로 ‘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예를 들어 꼽는 사람이 축구선수 호날두였습니다. 당시 20대의 나이에 실력, 외모, 돈, 인기, 성공, 영향력, 열정 모든 것을 다 가졌다는 겁니다. 어떤 친구들은 저스틴 비버 같은 아이돌을 꼽기도 했습니다. 저스틴 비버는 16살에 데뷔해서 첫 앨범에서만 무려 7곡을 빌보드차트 핫100에 진입시킨 기록을 가진 가수입니다. 포브스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3위로 선정한 바 있고, 한해 2천만장의 앨범을 판매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20대로 손꼽힌 바 있습니다. 이 외에도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피겨스타 김연아 같은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으로 꼽혔습니다. 꼭 이런 유명 인사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젊은 나이에 탁월한 성공을 거두거나, 실력과 재력에외모, 인성까지 다 갖춘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한편으론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면
지난 1월, 한국 테니스 역사상 최초로 정현 선수가 그랜드슬램대회중 하나인 호주오픈4강에 진출해서 온통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정현 선수가 4강에서 만난 상대가 ‘테니스의 황제’ 페더러였습니다. 발바닥 부상으로 몸이 좋지 않았던 정현 선수는 결국 페더러의 벽 앞에 도전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절대적으로 강한 상대와 맞서려면 철저하게 준비 돼야지, 의지만 가지고 안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광야에서 예수님이 인간대표로 사탄과 맞서 첫 대결을 벌이는 장면입니다. 전적만 놓고 보면, 사탄이 훨씬 우세합니다. 사탄은 지금껏 인간과 맞대결에서 패배한 경우가 없는 반면,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을 주린 후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3셋트까지 경기 결과는 놀랍게도 3-0, 예수님의 완승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닥난 체력과 극한 상황에서도 무패전적의 상대에게 단 한셋트도 내주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첫 번째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탄은 ‘하나님보다, 먹고 사는 현실이 먼저다!’는 논리로 공격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이 시험에 다 넘어졌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보다 대학과 안정적 직장, 심지어 시급 몇
유명한 승려 분에게 한 청년이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자신이 해외의 가난한 나라에 봉사를 하러갔는데 아무도 자기 수고를 알아주지 않고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람도 못 느끼고 허탈해서 돌아왔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저도 청년들로부터도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지역아동센터나 다문화가정 어린이 사역에 황금 같은 시간을 쪼개서 봉사하러 가면 종종 아이들이 이런 반응을 보인답니다.‘ 선생님, 여기 왜 왔어요? 봉사점수 따려고 왔죠?’ 아이들이 자기의 선의를 무시하는 거 같아 동기부여도 안 되고, 힘이 빠진다는 겁니다. 이런 질문에 그 스님은 뭐라고 답했을까요? ‘칭찬이나 감사와 같은 심리적 보상을 위해서 하는 봉사는 진정한 봉사가 아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답하실까요? 본문에서 예수님은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43절). 행동과 실천은 존재의 근원적인 상태, 즉 마음과 따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마음이야 어떻든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괜찮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동은 사실 마음에서부터 흘러나옵니다. 문제는, 우
많은 부모님들은 자녀의 진로를 계획할 때, ‘안정적인 직업’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의사, 법조인, 공무원, 교사, 대기업 등을 우선에 둡니다. 반면 자녀들이 원하는 직업군은 연예인, 스포츠선수가 1,2위를 차지합니다. 미디어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직업군이고 멋있게 보이기 때문이죠. 전문가들은 진로를 선택할 때, 자신이 좋아하면서도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조언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고,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뭘 잘하고 좋아하는가보다 뭐가 안정적인가를 생각하니까 현실적인 괴리가 생깁니다. 예수님은 12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맡기며 세상에 보내실 때, 제자들의 모든 필요가 채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주님의 권세(엑수시아)와 능력(두나미스)도 나눠주실 뿐 아니라, 먹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도 공급해 주실 것을 믿고 짐을 가볍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제자들의 손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풍성히 먹이신다는 사실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소유가 아니라, 사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에는 ‘반전’이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사람들은 전형적인 인물 보다 ‘반전’있는 캐릭터에 더 매력을 느낍니다. 예를 들면,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 나오는 아라곤 같은 인물이 그렇습니다. 반지의 제왕 1편에서 아라곤이 처음 등장할 때는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 나쁜 사람인가 헷갈립니다. 얼마 후 좋은 사람인가보다 안심하게 되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주인공이라기보다 그저 조력자에 불과한 떠돌이 검객 같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아라곤이 인간 왕의 마지막 후손인 것이 밝혀지고, 나중에는 악한 사우론의 시대를 끝내고 인간세계의 왕이 되는 인물로 전면에 그려집니다. 이런 부분만 놓고 봐도, 톨킨이 얼마나 탁월한 이야기꾼인지 감탄을 하게 됩니다. 누가복음을 읽어보면, 20세기의 톨킨보다 훨씬 오래 전 고대의 역사가인 누가가 얼마나 치밀하고도 탁월한 이야기꾼인지에 새삼 놀랍니다. 누가복음에는 어떤 인물도 전형적인 인물이 없고, 이야기는 항상 반전에 반전을 거듭합니다. 누가가 묘사하는 반전 있는 캐릭터들 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는 인물은 물론 예수님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한 번에 다 보여주지 않습
1월6일은 교회력으로 주현절(Epiphany)이라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예수님이 온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하나님을 나타내 주심을 기념하는 날인데, 서방교회에서는 특히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예수님을 경배하러 갔던 일을 기념합니다. 이전에 한 교회의 주현절 배너에 “Pursue something greater... like the Magi”(동방박사들처럼 더 위대한 것을 추구하라!)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모르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도 모르는 이방인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처럼, 그저 자신의 욕심과 개인적 소망을 추구하며 살기 급급한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이들입니다. 그런 동방박사들이 왜 굳이 메시야를 찾아 멀고 힘든 여행길에 나섰을까요? 그들이 생존과 안정의 욕구를 뛰어넘는 더 높고 위대한 것을 추구했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어떤 더 높은 목표를 품고 추구해야 할까요? 첫 번째는 말씀의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백성에게 전달해서 그들을 움직여 갑니다. 하나님이 ‘이 백성과 함께 일어나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오래 전 페이스북에서 디즈니 청소 노동자 이야기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디즈니는 야간 주간 청소 스텝들을 단순히 ‘청소 노동자’로 여기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디즈니의 모든 쇼를 연출하는 최고의 ‘무대 연출가’라는 자부심을 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일이 디즈니를 찾는 고객들의 행복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인식하고 일을 합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까지도 세심하게 청소 하고, 아이스크림이 떨어져 울고 있는 아이에게 가장 먼저 달려가 주변을 깨끗이 치워주고 새 아이스크림을 쥐어주어 아이의 미소를 되찾아주는 역할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오늘 출애굽기에 나오는 성막을 짓는 사람들도 자신의 일이 얼마나 거룩하고 중요한지를 알고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 감당한 사람들입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 같은 장인들, 실을 뽑고 성막의 여러 재료를 만든 “마음이 슬기로운” 이름 없는 여인들, 귀한 보석과 재료들을 기쁨으로 드린 족장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성경이 인류의 타락이후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람으로 표현하는 최초의 인물들이 브살렐과 오홀리압이라는 사실입니다. 왜 모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