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친구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왠지 공감이 가고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심지어 그들이 욥보다 내 생각을 더 잘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사실 오늘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여줍니다. 늘 정답만 말하는 데 익숙해져, 입바른 충고는 잘도 하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공감하고 경청하는 능력은 부족한, ‘정통 그리스도인’의 모습 말입니다. 욥처럼 뜻 모를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공감입니다. 함께 울어주고, 함께 아파해 줄 누군가가 정말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아 믿음조차 흔들리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때 그냥 가만히 어깨를 다독여주며 함께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 그러면 안 된다’ ‘이래야한다’는 섣부른 충고와 조언을 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말들을 위로랍시고 너도나도 건넬 때 듣는 사람은 고통스럽습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의 무게만도 힘든데, 그런 말들 때문에 상처가 더 깊어집니다. 그러나 욥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그는 현실이 ‘정답’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봅니다. 그렇다고 그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의심하는 것은 결코
바울과 아볼로는 인간적으로 보면 라이벌이 될 수도 있는 관계입니다. 아볼로는 바울이 에베소를 떠난 후에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이 선임자고, 아볼로가 후임자입니다. 그런데 바울보다 아볼로가 더 주목을 받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아볼로는 학문이 높고 수사에 능했으며 구약성경에도 능통했던 반면, 바울은 비록 학문은 뛰어났지만 일부러 그리스식 수사법을 사용하지 않았고 언변도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수사법에 익숙한 헬라인들에게도 아볼로가 훨씬 잘 먹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볼로에게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찍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 시대에 속한 관점에서 복음을 알았지, 성령 강림 이후 새 시대의 관점에서 복음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복음을 더 정확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볼로를 복음의 동역자로 인정하고 조금도 라이벌 의식을 갖거나 질투하거나 깎아 내리지 않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광야에서 말씀으로 서고 광장에서 말씀으로 살라!" 2017년 일원동교회의 표어입니다.광야와 광장, 어찌보면공존이 불가능해 보이는 아주 상반된 곳입니다. 광야는 고독하게 홀로 주님과 직접 대면하는 자리를 말합니다. 광장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터와 직장, 문화와 경제와 정치를 다루는 곳,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하며 물건을 사고파는 모든 일상적 삶의 자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이 곳 중 그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아니, 포기해서는 안됩니다.광야 속에서 세미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삶의 광장에서 주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베뢰아의 성도들과 아덴에서의 바울은 말씀으로 살아가는 두 가지 길을 보여줍니다. 먼저 베뢰아 사람들은 광야에서 말씀으로 서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그저 소비하는 청중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분별없이 맹목적으로 말씀을 받거나, 말씀을 한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지도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 정말 그러한가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며 씨름했습니다. 누가 일일이 떠먹여 주지 않아도 스스로 말씀을 찾아 먹고 주야로 묵상하는 것은 광야에 서는 것 같은 고독한 일입니다. 분주한 삶에 익숙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끝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자칫, 하나님의 뜻을 놓쳤다가는 낭패를 당하고 인생이 추락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싸여있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복음을 오해한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얽매이게 하거나 두렵게 하지 않고, 무한한 자유를 줍니다. 복음을 받고 성령 안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어떤 선택이든지 담담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회의가 채택한 결론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자유를 허용하고, 율법의 짐을 지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공문은 ‘너희가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는 인사로 마무리됩니다. 율법에 얽매여 이런 저런 규제를 받지 않더라도, 복음의 자유 안에서 스스로 삼가고 행하는 이들에게 모든 일이 잘 될 거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어마어마한 자유의 선물을 함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사도들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성령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따라 행했던 모든 선택들이 결국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2차 선교여행에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의 문제에서 다
바울은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 열광적인 호응과 맹렬한 비난을 동시에 받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뉩니다. 복음의 빛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이들과 어둠 속에 머물며 복음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이들입니다. 믿고 회심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반대편의 공격도 더욱 거세어지는 것을 봅니다. 복음 전도자로서 바울의 인기와 명성은 바울에 대한 시기 질투와 항상 비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들의 반응에 그리 흔들리지 않는 것을 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비난과 모욕을 당하고, 거센 위협과 죽음의 위험에까지 처해도 바울은 훌훌 털고 일어나 자기 갈 길을 갑니다. 대적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가해올 때는 낙심해 주저앉을 법도 한데, 바울은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비난과 공격으로 상처를 입어도 쓰러지지 않고 부르심을 향해 나아가는 바울의 모습에서, 그의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찬사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행했을 때 사람들은 바울을 신이라 칭송하며 숭배하려 했습니다. 오늘날 미디어에서 ‘공부의 신’이니, ‘직장의 신’이니 무슨 ‘여신’이니.
고후 9:6-8 "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한국 교회에는 오랫동안 ‘축복의 복음’이 번성했습니다. 많은 기도를 드리고, 많은 헌금을 드리고, 많은 봉사를 하면,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아 세상에서 성공하고, 물질적으로도 번성한다는 논리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난하고 희망이 없었던 시절에 축복의 복음은 큰 매력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복 받고 잘 되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고, 헌신하면서, 성장의 큰 동력을 얻었습니다. 얼핏 보면,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심음과 거둠’의 원리는 한국 교인들에게 익숙한 축복 신앙을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 씨를 적게 뿌리면 수확을 적게 거두고, 아낌없이 많이 뿌리면 많은 수확을 얻는 것처럼, 헌금도 아낌없이 많이 드리는 사람이 더 많은 은혜를 받는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종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처음과 나중이시며, 마침과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 되십니다(22:13). 그 분 안에서 어두운 밤이 물러가고 광명한 새벽별이 비추어 새로운 날이 찬란하게 밝아 옵니다(22:16). 그러므로 종말은 온갖 고난과 역경 끝에 해피엔드로 이야기가 끝맺어지는 것과 동시에, 가장 위대하고 흥미진진한 진짜 이야기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C. S. Lewis는 그의 유명한 판타지 소설 <나니아 연대기>의 마지막 편인 <최후의 전투>의 마지막 장을 이렇게 끝맺고 있습니다. “그 후에 일어나기 시작한 일들은 너무나도 위대하고 아름다워서 나는 그것들을 쓸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것은 모든 이야기의 결말이며, 우리는 그들 모두가 그 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진짜 이야기의 시작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 그들의 모든 삶과 나니아에서 그들의 모든 모험은 책 표지와 속표지에 해당되는 것이었을 뿐이다. 이제 마침내 그들은 이 땅의 그 누구도 읽은 적 없는 <위대한 이야기 제 1장>을 시작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영원히 계속되며, 새로운 장이 열릴 때마
도시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부심이 강합니다. 서울처럼 한 나라의 중심이 되는 도시나, 뉴욕처럼 유행과 문화의 최첨단 도시, 런던과 로마처럼 유서 깊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부심이 더 큽니다. 성경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이 문명화된 도시로 끝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도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시이며, 영원한 본향입니다. 아픔과 눈물 많던 수고로운 인생길이 모두 끝날 때, 우리를 기다리며 맞아 줄 영원한 하나님의 품과 같은 곳입니다. 사람들이 도시에 끌리는 이유는 편리함과 문화적 혜택, 많은 사람들이 뿜어내는 공동체적 가치와 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땅의 도시는 그 화려함의 그늘에 죄의 오염과 모순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전원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이 땅의 차가운 “회색 도시”와는 다릅니다. 도시의 매력과 활기가 넘치지만 죄와 불순물이 전혀 없는 “순수 청정 도시”이자 생명력이 가득한 “녹색 도시”입니다. 또한 새 예루살렘은 결코 ‘따분한 천국’이 아닙니다. 디즈니월드보다 훨씬 더 익스트림한 어드벤처가 펼쳐지고, 우주여행같이 즐거운 상상이 구현될 수도 있는 곳입니다. 위대한
Exodus Now and Then(6): 하나님은 왜 제일 먼저 "나일"을 치셨는가? 나일 강은 풍요와 생명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강을 신성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통해 이집트를 심판하실 때 나일 강을 가장 먼저 치십니다. 왜일까요? 물론, 무엇보다 나일강이 이집트인들이 숭배하던 하피(나일 강을 범람하게 하는 신)나 헤케트(개구리 머리를 한 풍요의 여신)와 같은 우상들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열재앙을 통해 하나님은 이집트 우상들의 거짓됨을 하나씩 차례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다른 그 무엇보다, 나일을 가장 먼저 치신 이유는 나일이 바로 이집트의 교만과 자부심의 가장 큰 근원이었기때문입니다. 이집트인들이 지금 '내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콧방뀌를 뀌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파라오와 이집트인들이 뭘 믿고 그토록 오만합니까? 바로 나일강이 주는 풍요와 안락함과 번영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 나일강의 범람이 가져온 풍요로 인해 이집트에는 찬란한 고대문명이 발달하기도 했지만 그 문명의 그늘 뒤에 엄청난 교만과 강포함이 쌓여 있었습니다.이집트는 그들이 세상의 중심이고 파라오가 온 세상의 통치자라 자부했
Exodus Now and Then(5): 하나님 나라의 이인자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1등을 좋아하고 일인자가 되기를 선호하지만, 이인자나 조력자가 되기를 꺼려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위대한 조력자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요. 가장 대표적인 예가 모세의 동역자 아론,다윗의 평생 친구였던 요나단 왕자,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 등입니다.아론Aaron과 요나단Jonathan은 외국에서는 흔한 이름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다윗, 모세, 다니엘, 바울 이런 이름들은 꽤 있지만, 요나단, 아론, 바나바 이런 이름은 흔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이름은 다니엘인 것 같습니다. 다니엘처럼 출세하고 성공하고 똑똑한 사람이 되라고 자녀들의 이름을 다니엘로 지어주는 것 같습니다. 선교사님들 중에는 유독 바울이라는 이름이 많습니다. 물론, 바울이 위대한 선교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교사님들 중에 바나바라는 이름을 가진 분들은 아직 못 봤습니다. 바나바 역시 훌륭한 선교사였지만 조력자로서 바울의 그늘에 가려져 있으니까 이왕이면 바나바보다 바울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바울, 모세, 다니엘처럼 훌륭하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Exodus Now and Then (4): 파라오 앞에 선 모세 우리 시대는 힘 있는 자와 가진 자의 목소리가 모든 것을 압도해 버리는 세상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쉽게 위축되고, 수없이 좌절하기도 합니다. 주위에 나보다 더 잘나고 더 많이 가지고, 더 힘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느끼면 급격하게 자신감을 잃고 위축됩니다. 아무리 예쁜 여성도 자기보다 조금만 더 예쁘고 주목받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급격하게 자존감이 떨어지거나 걷잡을 수 없는 질투심과 열등감에 휩싸인다고 합니다. 오래 동안 청년 사역을 하면서, 소위 명문대에 다니는 학생들이 열등감을 더 크게 느낀다는 사실을 종종 발견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자기가 최고인 줄 알았다가 대학에 가보니 자신의 실력과 능력이 평범해서 노력만으로 따라잡기 어려운 상대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엄청난 좌절의 늪에 빠지는 것입니다. 오늘 파라오 앞에 선 모세는 이러한 현실의 모습과 정반대의 그림을 보여줍니다. 파라오는 세계 최고의 권력자이고 세상에서 주목받고 인정받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반면, 모세는 아무것도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무명의 목동이고, 이집트 노예들 중의 한 사람일 뿐입
Exodus Now and Then(3): 떨기나무 불꽃 앞에 선 광야의 망명자 왜 하나님은 하필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을까요?하나님이 지금 모세에게 신기한 불꽃 쇼를 보여주셔서 모세를 감동시키려는 것일까요?그럴려면 좀 더 쇼킹한 것을 보여주셔야 했을 것입니다.사실 떨기나무는 광야에서 흔한 나무였고, 뜨거운 사막에서 떨기나무에 스파크가 일어 불타는 것 역시 흔한 현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불꽃이 떨기나무를 태우지 않고 계속 불타고 있었고, 그 불꽃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 떨기나무는 모세의 일생을 보여주는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에 임재하신 것처럼,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사용하시기 위해 모세에게 임하시고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소모품으로 쓰시지 않을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한다고 해서 소진되거나 닳아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스스로의 힘으로 불꽃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이 불꽃을 계속 타오르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Exodus Now and Then(2) 광야 학교에서 하나님을 만나라! 모세는 타고 난 사람입니다. 의협심에 불타고 대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희생하고 던질 줄 아는 용기와 의지를 가진 사람,이집트 왕자라는 신분을 버리고 자기 민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택하는 결단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생각에는 민족을 구원할 기회라고 여겼던 일 때문에 도리어 동족들의 거절과 배신을 당하고,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놓입니다. 어쩔 수 없이 모세는 광야로 도망가서 오랜 세월 무명의 망명자 신세로 살아갑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를 당장 쓰시지 않고 광야로 내모셨을까요. 이왕이면 젊고 패기 넘치고 민족을 위해 뭔가를 하겠다는 의지가 강할 때 사용하시면 좋았을 것을 왜 굳이 광야에서 오랜 세월 모세를 썩히시면서(?) 힘을 완전히 빼 버리셨을까요? 광야는 시험과 연단의 장소입니다. 거친 광야에 홀로 있는 동안 사람들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게 되고,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는 살아있는 감각을 배웁니다. 문명의 이기가 만들어 낸 풍요와 가진 자들이 만들어 낸 사회 질서가 얼마나 초라하고 오만하며 쉽게 무너져버릴 수 있는 것인지를 배우는 곳도 광야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이고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사랑이 먼저입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과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우리 몸을 사랑하듯 이웃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도덕적으로 실패하고 모든 것이 뒤틀리고 꼬이는 근본 원인은 바로 율법의 첫 번째 요구, 하나님 사랑에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울까요. 물론, 교회에 와서 찬양하고 예배드리면서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 마음과 힘과 뜻과 삶을 전부 드리는 신실하고 한결같은 사랑은 못합니다. 아니,안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삶에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기 때문에, 우리는 불신앙과 우상숭배를 공기처럼 흡입하며 살아갑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물질문명의 풍요와 그것이 조장하는 탐욕의 문화는 모든 진정한 풍요와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가려버립니다. 과학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법칙만으로 세상이 창조되고 유지되는 것처럼 우리의 사고를 지배합니다. 우리는 ‘바람을 잡는
어떤 무신론자들이 유대/기독교의 신을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영상을 본적이있습니다다. 내용은 도대체 왜 유대인들의 신은 안식일에 일을 하나 안하냐를 가지고 그렇게 옹졸하게 화를 내는가라는것이었습니다. 정말 신이 있다면, 오히려 세계적인 기아나 질병재해 전쟁 등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얼핏 그럴듯해 보이는 논리지만, 사실 성경이 말하는 율법의 참된 정신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이안식일을 주신 것은 안식일이라는 법과 규정에 사람을 옭아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쉼과 자유를주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첫 번째 정신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즐거워하며 감사함으로누리라는 초대입니다.세상에는 우리의 힘으로 만들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온갖아름답고 좋은 것들이 가득합니다. 밝은 햇살, 시원한 바람, 계곡에 흐르는 물, 맑은 공기와 시원한 그늘을 주는 숲과 나무들, 이름 모를 여름 꽃들, 노을이 그려내는 신비한 색의 조화, 상큼한 색색 과일들, 풍요로움이 넘치는 땅 ...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요 속에 경험하는 쉼과 치유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끝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