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우리 부부가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하고 있는 걸 6살 딸이 들었나 봅니다. 얼마 후 딸아이가 엄마한테 차분하고 논리적인 말투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엄마, 제가 보는 앞에서 아빠랑 말싸움하지 마세요! 아빠 말을 듣고 엄마가 양보해야죠. 그래도 이 집의 가장은 아빠잖아요.’ 엄마는 기가 막혀서 웃고, 저는 그냥 속으로만 웃었습니다. 그 뒤로 한동안 집사람은 딸아이 앞에서 저에게 함부로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 딸은 엄마편이라는데 어떻게 6살 딸아이가 아빠 편을 들게 되었을까요?
물론, 저희 딸아이가 늘 제 편을 드는 건 아닙니다. 나름 예리한 정치적 판단력(?)을 가지고 공정하게 엄마 편을 들 때도 있습니다. 엄마가 아빠 건강을 생각해서 ‘커피 그만 마셔라, 운동해라, 라면 먹지 마라’ 잔소리하는 것은 아빠가 들어야 한다고 똑같이 잔소리를 합니다. 사실 딸아이의 말은 저희가 평소 아이에게 가정예배나 가족 대화 시간에 늘 들려주었던 말을 그대로 ‘미러링’(mirroring) 한 것입니다. 부모의 말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가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딸아이에게 더 잘 반사해야겠다는 도전을 받습니다.
오늘날 뇌과학자들과 언어학자들은 ‘언어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부족에게는 ‘오른쪽, 왼쪽’이라는 단어가 아예 없어서 모든 위치나 방향을 항상 ‘동서남북’으로 표현한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그 부족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방향감각이 엄청나게 발달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어에서는 동사를 사용할 때 항상 그 행위의 주체(주어)를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스페인어에서는 주어보다 행동 자체를 표현합니다. 그 결과, 같은 사건을 목격해도 영어권 사람들은 누가 그 일을 했는지를 더 잘 기억하고, 스페인어권 사람들은 그 일이 사고였는지 고의였는지를 더 잘 기억한다고 합니다.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과 행동이 달라지는 겁니다.
교회는 말의 지배력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본질 자체가 같은 복음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동일한 믿음으로 고백하는 기초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교회 역사는 ‘말씀의 지배력’을 통해 주님의 교회가 굳건히 지켜져 왔음을 보여주는 예가 수없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니케아 신조가 만들어진 과정이 그렇습니다. 니케아 신조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아리우스파 이단의 거짓 가르침에 맞섰던 젊은 집사 아타나시우스의 주도하에 교회의 고백으로 공인되었습니다. 사실 당시 교회에는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라면 어떻게 하나님과 본질상 동등할 수 있느냐는 인간적 논리가 사람들에게 더 설득력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가 불같이 일어나 다수였던 아리우스파를 ‘말싸움’에서 이기고 하나님과 본질상 동일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고하게 변증합니다. 그 결과 아타나시우스는 평생 아리우스파들의 공격에 시달리며 고초를 겪었지만, 교회는 진리로 수호되어 그 생명력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파와의 말싸움에서 이기지 못했다면 교회의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진리에서 타협하고 밀린 만큼 교회의 역사와 생명력도 그만큼 더 후퇴했을 것입니다.
성경 역사에서도 ‘말싸움’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홀로 대결했을 때, 승리는 말싸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불대결을 제안하며 ‘바알과 여호와 중에서 불로 응답하는 신이 진정한 하나님이다’고 할 때, 백성들은 다 그 말이 논리적으로 ‘옳다’고 인정하고 동의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비를 내려달라고 발악하며 기도할 때 엘리야는 말로 그들을 다시 제압합니다. ‘바알은 신이니 묵상을 하고 있거나 잠깐 외출을 했거나 어디 출타중이거나 혹 잠 들었었나 보다. 더 크게 불러 봐라.’ 그러나 바알과 그의 선지자들은 엘리야의 말 공격에 묵묵부답이었습니다.
말싸움에서부터 확실히 기선을 잡은 것이지요. 이후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신 불 싸움과 하나님께서 큰 비로 응답하신 물 싸움에서도 모두 승리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세상을 이기고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누구의 말이 이기느냐에서부터 판가름 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신조와 고백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을까요? 교회가 고백하고 지켜낸 말씀이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통치를 이룬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세상과의 말싸움에서, 말의 지배력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습니다. 각 시대마다 상황과 도전은 달랐지만, 말씀의 힘을 가진 교회들은 시대의 도전에 맞서 하나님 나라의 전진을 이루어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시대는 교회가 가진 말의 지배력이 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미디어의 발달로 그 어느 때보다 말씀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정작 말씀이 사람들의 언어와 사고를 장악하는 지배력은 급속도로 약화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은 교회의 신조나 교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뭅니다. 그것을 논리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젊은이들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경의 역사와 가르침에 대해서도 한심할 정도로 무지하거나, 설령 안다 해도 얕고 피상적인 이해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말싸움에서 논리나 감동, 파급력과 설득력 모두 세상에 밀려 버립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이겨야 할 교회가 말싸움에서부터 세상의 공격을 못 당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세상이 가지고 있는 ‘좋은 말들’은 대부분 지난 시대 교회가 말의 지배력을 가지고 있을 때, 사회 속에 확산시키고 뿌리내렸던 말들입니다. 사실 ‘좋은 말’은 다 성경에서 나온 것인데, 말의 지배력을 세상에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말은 맹신과 미신일 뿐이라는 조롱이 세상에 만연하고, 교회도 스스로의 ‘말’에 자신 없어하며 위축되어 점점 세상에서 후퇴합니다.
어떻게 이 싸움을 역전시켜야 할까요? 먼저 고백 공동체인 교회가 진리의 말씀 위에 굳게 서 있는지 스스로를 깊이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백하는 말씀,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말씀의 의미와가치와 무게를 오늘 우리 시대의 언어로 다시 살려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선조들처럼 말씀을 지키기 위해 그 말씀을 살아내는 수고를 치열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말에는 책임이 따르는 데 교회가 스스로 고백하는 말씀을 책임지고 지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말씀이 힘이 있겠습니까.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0) 고 명령하셨습니다. 말씀을 부지런히 힘써 가르치는 것과 더불어 그 말씀을 지키고 말씀으로 세상과 진검승부를 펼칠 수 있도록 하는 강도 높고 집중된 훈련이 필요합니다.
과거 세상 사람들은 ‘예수쟁이들은 말쟁이들’이라고 교회를 조롱했습니다. 교회가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다는 뼈아픈 지적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때는 말이라도 잘했구나 생각이 듭니다. 사도 바울도 아테네에서 선교할 때 ‘말쟁이’라는 조롱을 들었습니다. 말쟁이라는 조롱을 들어도 괜찮습니다. 말이라도 잘해야지요. 그래야, 그 말씀을 붙들고 지키고 살아내는 세상과의 진검승부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언어와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말은 누구의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를 지배할 때, 교회는 반드시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시대 속에 여전히 세력을 얻어 힘 있게 뻗어나갈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 (행 19:20)
기도 : 우리의 언어가 진리되신 말씀의 지배속에 힘을 얻고 세상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갖게 하소서!
배준완 목사 (바이블 키 교리대학 교리의 키 4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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