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부심이 강합니다. 서울처럼 한 나라의 중심이 되는 도시나, 뉴욕처럼 유행과 문화의 최첨단 도시, 런던과 로마처럼 유서 깊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부심이 더 큽니다. 성경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이 문명화된 도시로 끝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도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시이며, 영원한 본향입니다. 아픔과 눈물 많던 수고로운 인생길이 모두 끝날 때, 우리를 기다리며 맞아 줄 영원한 하나님의 품과 같은 곳입니다. 사람들이 도시에 끌리는 이유는 편리함과 문화적 혜택, 많은 사람들이 뿜어내는 공동체적 가치와 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땅의 도시는 그 화려함의 그늘에 죄의 오염과 모순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전원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이 땅의 차가운 “회색 도시”와는 다릅니다. 도시의 매력과 활기가 넘치지만 죄와 불순물이 전혀 없는 “순수 청정 도시”이자 생명력이 가득한 “녹색 도시”입니다. 또한 새 예루살렘은 결코 ‘따분한 천국’이 아닙니다. 디즈니월드보다 훨씬 더 익스트림한 어드벤처가 펼쳐지고, 우주여행같이 즐거운 상상이 구현될 수도 있는 곳입니다. 위대한
Exodus Now and Then(6): 하나님은 왜 제일 먼저 "나일"을 치셨는가? 나일 강은 풍요와 생명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강을 신성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통해 이집트를 심판하실 때 나일 강을 가장 먼저 치십니다. 왜일까요? 물론, 무엇보다 나일강이 이집트인들이 숭배하던 하피(나일 강을 범람하게 하는 신)나 헤케트(개구리 머리를 한 풍요의 여신)와 같은 우상들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열재앙을 통해 하나님은 이집트 우상들의 거짓됨을 하나씩 차례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다른 그 무엇보다, 나일을 가장 먼저 치신 이유는 나일이 바로 이집트의 교만과 자부심의 가장 큰 근원이었기때문입니다. 이집트인들이 지금 '내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콧방뀌를 뀌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파라오와 이집트인들이 뭘 믿고 그토록 오만합니까? 바로 나일강이 주는 풍요와 안락함과 번영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 나일강의 범람이 가져온 풍요로 인해 이집트에는 찬란한 고대문명이 발달하기도 했지만 그 문명의 그늘 뒤에 엄청난 교만과 강포함이 쌓여 있었습니다.이집트는 그들이 세상의 중심이고 파라오가 온 세상의 통치자라 자부했
Exodus Now and Then(5): 하나님 나라의 이인자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1등을 좋아하고 일인자가 되기를 선호하지만, 이인자나 조력자가 되기를 꺼려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위대한 조력자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요. 가장 대표적인 예가 모세의 동역자 아론,다윗의 평생 친구였던 요나단 왕자,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 등입니다.아론Aaron과 요나단Jonathan은 외국에서는 흔한 이름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다윗, 모세, 다니엘, 바울 이런 이름들은 꽤 있지만, 요나단, 아론, 바나바 이런 이름은 흔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이름은 다니엘인 것 같습니다. 다니엘처럼 출세하고 성공하고 똑똑한 사람이 되라고 자녀들의 이름을 다니엘로 지어주는 것 같습니다. 선교사님들 중에는 유독 바울이라는 이름이 많습니다. 물론, 바울이 위대한 선교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교사님들 중에 바나바라는 이름을 가진 분들은 아직 못 봤습니다. 바나바 역시 훌륭한 선교사였지만 조력자로서 바울의 그늘에 가려져 있으니까 이왕이면 바나바보다 바울이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바울, 모세, 다니엘처럼 훌륭하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Exodus Now and Then (4): 파라오 앞에 선 모세 우리 시대는 힘 있는 자와 가진 자의 목소리가 모든 것을 압도해 버리는 세상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쉽게 위축되고, 수없이 좌절하기도 합니다. 주위에 나보다 더 잘나고 더 많이 가지고, 더 힘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느끼면 급격하게 자신감을 잃고 위축됩니다. 아무리 예쁜 여성도 자기보다 조금만 더 예쁘고 주목받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급격하게 자존감이 떨어지거나 걷잡을 수 없는 질투심과 열등감에 휩싸인다고 합니다. 오래 동안 청년 사역을 하면서, 소위 명문대에 다니는 학생들이 열등감을 더 크게 느낀다는 사실을 종종 발견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자기가 최고인 줄 알았다가 대학에 가보니 자신의 실력과 능력이 평범해서 노력만으로 따라잡기 어려운 상대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엄청난 좌절의 늪에 빠지는 것입니다. 오늘 파라오 앞에 선 모세는 이러한 현실의 모습과 정반대의 그림을 보여줍니다. 파라오는 세계 최고의 권력자이고 세상에서 주목받고 인정받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입니다. 반면, 모세는 아무것도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무명의 목동이고, 이집트 노예들 중의 한 사람일 뿐입
Exodus Now and Then(3): 떨기나무 불꽃 앞에 선 광야의 망명자 왜 하나님은 하필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을까요?하나님이 지금 모세에게 신기한 불꽃 쇼를 보여주셔서 모세를 감동시키려는 것일까요?그럴려면 좀 더 쇼킹한 것을 보여주셔야 했을 것입니다.사실 떨기나무는 광야에서 흔한 나무였고, 뜨거운 사막에서 떨기나무에 스파크가 일어 불타는 것 역시 흔한 현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불꽃이 떨기나무를 태우지 않고 계속 불타고 있었고, 그 불꽃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 떨기나무는 모세의 일생을 보여주는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에 임재하신 것처럼,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사용하시기 위해 모세에게 임하시고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소모품으로 쓰시지 않을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한다고 해서 소진되거나 닳아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스스로의 힘으로 불꽃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이 불꽃을 계속 타오르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Exodus Now and Then(2) 광야 학교에서 하나님을 만나라! 모세는 타고 난 사람입니다. 의협심에 불타고 대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희생하고 던질 줄 아는 용기와 의지를 가진 사람,이집트 왕자라는 신분을 버리고 자기 민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택하는 결단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생각에는 민족을 구원할 기회라고 여겼던 일 때문에 도리어 동족들의 거절과 배신을 당하고,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놓입니다. 어쩔 수 없이 모세는 광야로 도망가서 오랜 세월 무명의 망명자 신세로 살아갑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를 당장 쓰시지 않고 광야로 내모셨을까요. 이왕이면 젊고 패기 넘치고 민족을 위해 뭔가를 하겠다는 의지가 강할 때 사용하시면 좋았을 것을 왜 굳이 광야에서 오랜 세월 모세를 썩히시면서(?) 힘을 완전히 빼 버리셨을까요? 광야는 시험과 연단의 장소입니다. 거친 광야에 홀로 있는 동안 사람들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과 마주하게 되고,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는 살아있는 감각을 배웁니다. 문명의 이기가 만들어 낸 풍요와 가진 자들이 만들어 낸 사회 질서가 얼마나 초라하고 오만하며 쉽게 무너져버릴 수 있는 것인지를 배우는 곳도 광야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이고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사랑이 먼저입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과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우리 몸을 사랑하듯 이웃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도덕적으로 실패하고 모든 것이 뒤틀리고 꼬이는 근본 원인은 바로 율법의 첫 번째 요구, 하나님 사랑에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울까요. 물론, 교회에 와서 찬양하고 예배드리면서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 마음과 힘과 뜻과 삶을 전부 드리는 신실하고 한결같은 사랑은 못합니다. 아니,안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삶에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기 때문에, 우리는 불신앙과 우상숭배를 공기처럼 흡입하며 살아갑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물질문명의 풍요와 그것이 조장하는 탐욕의 문화는 모든 진정한 풍요와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가려버립니다. 과학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법칙만으로 세상이 창조되고 유지되는 것처럼 우리의 사고를 지배합니다. 우리는 ‘바람을 잡는
어떤 무신론자들이 유대/기독교의 신을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영상을 본적이있습니다다. 내용은 도대체 왜 유대인들의 신은 안식일에 일을 하나 안하냐를 가지고 그렇게 옹졸하게 화를 내는가라는것이었습니다. 정말 신이 있다면, 오히려 세계적인 기아나 질병재해 전쟁 등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얼핏 그럴듯해 보이는 논리지만, 사실 성경이 말하는 율법의 참된 정신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이안식일을 주신 것은 안식일이라는 법과 규정에 사람을 옭아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쉼과 자유를주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첫 번째 정신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즐거워하며 감사함으로누리라는 초대입니다.세상에는 우리의 힘으로 만들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온갖아름답고 좋은 것들이 가득합니다. 밝은 햇살, 시원한 바람, 계곡에 흐르는 물, 맑은 공기와 시원한 그늘을 주는 숲과 나무들, 이름 모를 여름 꽃들, 노을이 그려내는 신비한 색의 조화, 상큼한 색색 과일들, 풍요로움이 넘치는 땅 ...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요 속에 경험하는 쉼과 치유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끝없는
오래전 영화 중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the Father)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실화를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제리라는 말썽쟁이 아들과 주세페라는 고지식한 아버지 이야기입니다. 이 부자는 아일랜드 사람인데, 오래전부터 아일랜드와 영국은 종교적/정치적 갈등으로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고 있었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인들의차별 때문에 좋은 직업을 얻기가 어려워서 주세페도 변변치 않은 직업을 갖고 있었고, 제리는 그런 아버지를부끄럽게 여겨 더 빗나가곤 했습니다. 정직하고 신앙심 깊게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 잔소리를 뒷전으로 듣는 제리는 도둑질에다 마약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는 백수건달이었지요. 그런데 어느날 아일랜드 무장단체에 의해런던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나고 우연히 그 근처에 있었던 제리와 친구들이 폭탄테러범으로 몰리게 됩니다. 경찰은고문을 통해 제리에게 거짓 자백을 받아 종신형을 선고하고, 제리의 아버지 주세페도 폭탄제조를 도왔다는혐의를 씌워 징역을 살게 합니다. 제리는 자신의 잘못으로 아무 죄도 없는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온 것도 미안했는데, 감옥 안에서 아버지가 병으로 죽게 되자,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자신들
유대교는 고대종교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신을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으로 규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철저히 배격했던 종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신을 두려워하고숭배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신을 어떻게숭배하고 섬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고대의 신들은 모두 인간의깊은 공포심과 동경을 반영한 형상들- 때로는 끔찍하고 기괴스럽고, 때로는아름답고 위엄있는 모습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은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으로도 자신을 표현되하거나 예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분은 자신의 백성들을큰 능력으로 구원하시고, 그의 종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거룩한 말씀-토라’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백성들이 토라를 순종하고 실천함으로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온 세상에 나타내 보여주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서 하나님을 숭배하고픈유혹을 계속 떨쳐내지 못했습니다. 아론이 광야에서 금송아지가 그랬고, 여로보암이실로에 만든 금송아지가 그랬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명나무’로 여기고 섬겼던 모든 언덕위의 크고푸른 나무들이 그랬고, 바알과 아세라 신이 그랬습니